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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직격탄 쏴주는 남자가 좋더라”   [ 눈사람/신한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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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7년 대한민국 20~30대 여성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늘 사랑에 빠지거나,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늘 우울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요?


#1. 약속 시간은 오후 6시, 장소는 서울 홍대 근처 와인바 ‘마고’.

약속 시간 6시. 그러나 ‘마고’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아무도 없다. 30분이 지나자 수현씨의 구두 굽 소리가 들린다. 또각또각, 문이 열리고 수현씨가 들어온다. 나머지 3명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휴대전화를 돌리는 수현씨.

이어 인선씨가 얼굴을 내민다. 이어 하경씨와 서영씨도 도착. 내비게이션에 ‘홍대’를 쳤더니 대학로 ‘홍대 미술학원’으로 안내해 늦었다는 하경씨와 직장이 있는 수원에서 오다 보니 늦었다는 서영씨까지 모두 식탁에 둘러앉는다.

샴페인 앞에서 일제히 디카를 꺼내다

#2. 샴페인으로 시작한 저녁식사,
식도락은 괴로워


넷이 머리를 맞대고 수다에 한창인데, 저녁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샴페인이 서빙된다. 다들 말 없이 꺼내 드는 것은 다름아닌 카메라. 소형 디지털 카메라부터 디에스엘알 카메라까지 ‘찰칵찰칵’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며 샴페인 병을 찍는다.

서영 : 동호회를 하고 나서 어느 식당에 가든 사진을 찍게 되는 것 같아.


하경 : (한 손에 디카를 들고) 요즘엔 식당에서 카메라를 들고 찍는 사람이 많잖아. 그래서 요즘 식당에서 카메라를 꺼내면 주방에서 음식이 더 잘 나오는 경우도 있어. 인터넷에 올라가잖아. 요즘에는 안 찍어도 찍는 척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니까.


서영: (샴페인을 한 모금 홀짝) 저는 샴페인 좋아해요. 모임 할 때 샴페인으로 시작하면 왠지 기분이 막 설레는 그런 게 있어.


수현 : 어느 날은 점심에 고기를 먹었는데 주류가 없이 먹은 거야. 빡빡해지면서 그랬는데 샴페인이 너무 ‘땡기더라구’.


인선 : 저는 샴페인도 좋아하지만 화이트 와인을 더 좋아해요.


서영: 지난번엔 소맥(소주+맥주)이 간이 제일 딱 맞는다고들 그랬잖아.(웃음)


하경: (손사래를 치며) 우리 입맛이 예민하잖아. 술도 입맛 따라서 예민하게 고르게 된다니까.


서영: 식도락이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있는 것 같아. 식도락 자체가 즐거움일 수 있지만 오히려 더 불행해지는 것 같기도 하거든. 아무 데나 가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을 막 따지게 되는 거야.


하경·수현·인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동시에) 맞아, 맞아!


수현: 특히 친구들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갔을 때 친구들이 나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그럴 때도 있어.


인선: 저는 그럴 때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동호회 사람들 모이면 너무 신나게 얘기해서 좋아요.

이직을 해볼까, 공부를 해볼까

#3. 파스타로 달아오른 식탁,
두통은 남들보다 더 열정적이기 때문?


샴페인 다음 차례는 파스타. 알리오 올리오가 서빙되자 일동 침묵. 요리를 처음 맛볼 때는 말을 하지 않는다. 왜? 맛에 집중해야 하니까. ‘마고’에 도착할 때부터 두통을 호소했던 하경씨, 두통이 두통약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하경: (약간 칭얼대듯) 나 오늘 왜 머리가 아픈지 아니? 사실 오늘 아는 사람을 한 명 만났어. 공연 기획 쪽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나에게 다른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는 거야. (누군가 딴청을 피우자 애교 섞인 목소리로) 어머머 내 얘기에 집중해! 집중 안하면 처음부터 다시 한다.


수현·서영·인선: (일동 차렷) 집중할게, 집중!


하경: 어쨌든 내 주변에 은근히 나보고 다른 일 해보라는 사람들 꽤 있거든. 법대 다니는 친구들은 사법시험 쳐보라고도 하고 경제학과 친구들은 회계사 어떠냐고도 하고. 그렇지만 머리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이끌어줄 사람도 없고. 이럴 때는 정말 바이올린 그만두고 싶어. 지금까지 음악 하면서 온 사람들 대부분 서너번씩은 그만두겠다고 하면서도 그걸 이기고 온 거야.


수현: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이해할 것 같아. 나도 가끔은 획기적인 일을 시작하고 싶어. 전공과 상관없는 그런 일.


하경: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얼마 전에 영화를 봤는데, 난초를 찾아다니는 남자 얘기였어. 거기 여자 주인공이 메릴 스트립인데 그 여자가 이 남자를 보면서 엄청 설레는 거야. 하나에 올인해서 다른 데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 그런 멋진 게 있다는 거지. 나는 지금 ‘나에겐 다른 재능이 있어’라고 하면서 다른 데 신경을 쓰고 있는 거거든. 사실 올인하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 그럼 나는 잔가지를 다 없애고 바이올린에 더 몰두를 해서 정말 죽을 때까지 바이올린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어. 지금 뭔가를 새로 시작할 수는 없을까?


수현: 뭐든지 힘들지 않은 건 없어.


서영: 옮겨볼까, 이직을 해볼까, 공부를 해볼까 고민을 하잖아요. 그런데 맘먹고 회사 때려치운 다음에 의사가 되겠다든지 하면서 인생을 확 바꾸지 않는 이상, 어디 가도 상사는 있을 거고 얼굴만 다른 사람이 있을 거고 나를 고달프게 하는 일들이 있을 거고.


수현: 그래도 그런 맘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나이 때문에 뭘 못 저지르면 바보

#4. 레드 와인 한 잔으로 들뜬 저녁,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직과 전직에 대한 고민이 스파게티 면발만큼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레드 와인이 와인잔을 가득 채우자 인선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인선: 저 직장 때려치우고 뉴욕으로 공부하러 가요. 뉴욕대에 식품학 공부하러요. 식품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는지.(웃음) 원래 작년에는 요리사가 되려고 요리 유학을 준비했었거든요. 그런데 회사에서 제가 먹는 거 좋아하는 게 소문이 났는지 저를 외식사업 하는 푸드 쪽으로 옮겨줬어요. 1년만 더 일해보라고. 지금 일은 굉장히 만족스러워요. 근데 뭔가 더 욕심이 나는 거예요. 여기서 일하면 계속 이 정도겠지 하는 생각이죠. 갔다 와도 똑같을 것 같기는 한데 갈 수 있을 때 가자 싶어요.

하경: 나이 때문에 뭘 저지르지 못하는 게 바본 거 같아. 재수만 해도 남들보다 뒤처진다면서 인생 끝난 것처럼 그렇고. 1~2년이 큰 것처럼 느껴지잖아.


서영: 우리나라 분위기가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몇 살에 뭐 해야 하고 딱딱 맞춰서 살아야 하는 거잖아. 취직 제때제때 해야 하고.


인선: (하소연하듯)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휴학도 한번도 안했죠. 생일도 빠른 생일이죠. 제가 취직을 22살에 했어요.


하경: 이거 은근히 자랑인데?(웃음)


인선: (웃으며) 아뇨. 그래서 제가 다른 게 더 보고 싶은 거예요. 시간이 들고 돈이 들더라도.


서영: 아까 하경 언니도 말했지만 불안한 미래, 정말 딱 내 얘기예요. 올해 5년차로 갓 대리 달았고 3년 반 후면 과장인데, 저희 부서는 영업 부서라서 과장급이면 다들 주재원으로 보내거든요. 그런데 여성들은 한계가 있죠. 문제는 제가 거의 첫 세대라는 거예요. 위에 롤모델이 없어요. 결혼해서 쭉 다니는 그런 사람이 아직 없어요.


하경: 역시 개척자군!


수현: 주재원은 가족까지 다 데리고 가는 거?


서영: (목소리 톤이 높아지며) 보통 가족들 다 데리고 가요. 여자들은 남편도 함께 가야 하니까 복잡해지는 거예요. 결혼해서 애 낳고 그렇게 다닐 자신도 없고. 저와 제 동기들이 롤모델이 되어야 하는데 다들 우왕좌왕이죠. 몇년 새에 여성 직원들이 엄청 늘었는데 정작 회사 내에선 여성 인력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너무 안 되어 있다는 거죠. 여성 직원에 대한 상사들의 마음가짐이나 태도, 또 회사의 복지가 부족한 게 아직도 많아요.


인선: 저도 동감해요. 회사에는 롤모델이 없어요. 예전부터 일과 결혼을 어떻게 조화롭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일 욕심이 있지만 결혼이나 가정을 포기하면서 하고 싶진 않거든요. 공부를 더 하려는 것도 회사에는 워낙 롤모델이 없고 차라리 기회가 있을 때 공부해서 다른 자리를 찾아보자는 마음도 있어요.


서영: 그래도 나이와 용기가 부러워요. 정말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


수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어서 더 고민스러운 건 아닐까.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원한다

#5. 등심 스테이크가 나오고, 역시
여자들 수다의 꽃은 남자, 꽃보다 남자!


두툼한 등심 스테이크가 접시 위에 등장하자 식탁에는 또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나이프 쓱싹대는 소리와 포크가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하경씨는 집에 있는 강아지 콩쥐와 팥쥐를 위해 모두에게 고기를 꼭 다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어쨌든 수다의 종착역은 역시 남자라는 거!

서영: 요즘은 정말 결혼을 꼭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


수현: 요즘 그 드라마 <불량커플>인가, 그거 딱 한번 봤는데 너무 공감된다니까. 나도 나 같은 딸 낳아서 키우고 싶어.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낳고 나서 내가 키울 자신은 없어. 혼자 사는 것도, 혼자 키우는 것도 싫어. 어쨌든 거기서 신은경이 아기 갖고 싶다는 마음만은 정말 동감해.


하경: (놀리듯 웃으며) 역시 수현은 여자의 마인드와 남자의 마인드가 섞여 있어. 모성애에서 바로 부성애로? (노래하듯) 목소리를 5도만 올리는 건 어때?


수현: 도레미파솔, 여기서 시작해?(웃음) 결혼 계획은 항상 하는데. 내 소원이 있다면 나이 아흔 넘어서 백발노인이 되어서도 내 할아방구랑 손 꼬옥 잡고 산책하는 거야.


하경: 여든아홉살에 만날 수도 있잖아. 그럼 아흔은 신혼?(웃음) 그것도 나름 희망찬 미래다! 뭐든지 길게 보면 조바심 낼 것도, 불안할 것도 없는데.


서영: 결혼을 하고 싶지만 강박관념에 쫓기듯 남자를 만나고 싶진 않아요. 주위 친구들을 보면 어떤 애들은 올해 안에 못 만나면 죽을 것처럼 선을 보고 다녀요. 저는 내년에 아홉수라 올해만 넘기면 1년은 무사히 넘어가겠다, 뭐 그러고 있다니까요.


인선: 완전 공감이에요.


수현: 만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사람 만나는 게 문제야.


서영: 나이를 먹을수록 맘에 맞는 사람 만나기가 어려워지잖아요.


하경: 해외펀드도 많이 하는데, 우리도 해외로 눈을.(웃음)


수현: 다들 결혼을 신중히 생각하는지라 남자도 신중히 고르는 것 같아.


서영: 너무 신중해서 탈이죠. 연애도 힘들다니까. 저는 제가 존경하고 믿고 따를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수현: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존경할 수 있는 사람, 내가 부르짖는 남성상이에요!


하경: 존경하는 남자라, 100가지 중에 3가지만 존경할 수 있으면 되잖아. 예를 들어, 일찍 일어난다든지 밥을 많이 먹는다든지 검색이 나보다 빠르다든지. 존경의 기준을 낮추고, 존경의 가짓수를 줄이면서 존경을 세분화하라. 오늘의 말씀!(일동 웃음)


서영: 전 잘났다고 떠드는 저한테 가끔 직격탄을 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좋아요.


수현: 내가 원하는 남자는 자기 외모에 투자할 줄도 아는 사람이야.


하경: 역시 화장품 마니아다운 발언이군. 나는 아이같이 순수한 면이 있는 사람이 내 스타일이야.


인선: 저도 순수한 면이 있는 사람, 공감이에요. 감성이 통하면 좋겠어요. 너무 자기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보다는 저랑 같이 취미와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요. 먹는 거랑 여행을 좋아하면 되죠.

정하경: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 애교 만점 재치 십만점의 30대 바이올린 연주자. 부드럽고 친근감 있게 다가가는 카리스마의 소유자.


한서영: 자기생각이 뚜렷한 20대 후반 S전자 해외영업팀 사원. 낯을 가리지만 한번 친해지고 나면 이보다 더 털털할 순 없다.


박수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30대 비올라 연주자. 중저음 목소리 속에 날카로움을 감추고 있다. 화장품 마니아.


이인선: 음식과 여행을 ‘완전’ 사랑하는 20대 중반 C푸드빌 상품기획자. 언젠가 세계여행을 떠나 전세계 맛집을 탐방하는 게 꿈인, 조용한 욕심쟁이.

정리·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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