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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ismatic Voice 'BaeHo' (Volume Up!)   [ 눈사람/신한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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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라는 가수가 있었다. 1942년생이시고, 1971년에 돌아가신 분이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세상 분이 아니셨다.

그런 그분의 음성을 21세기의 내가 P2P 사이트에서 다운 받아서
애플 나노라는 MP3 Player로 듣고 있다. 얼마전에 아는 형님이
내 나노에 들어있는 배호의 노래를 듣더니. '배호 노래가 담겨 있는
나노는 이세상에 이거 밖에 없을거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요즘도 가수는 많다. 더군다나 음향 장비도 많이 좋아져서 가수의
실력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듣고 있는 배호의 음성과 같은 느낌은 정말 찾기 힘들다.

배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소리 없이 비가 내리는 날에 허름한 술집의
삐걱거리는 나무 테이블에 나홀로 앉아 오뎅 국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 보며 소주잔을 비우고 있는것 같다.
그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배호의 음성에 담겨 있는 그 느낌이라는 것은 보통의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한(恨)'이라는 보편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 안개속에 가버린 사랑

작사 전  우
작곡 나규호
노래 배  호



사랑이라면 하지말것을

      처음 그순간
     만나던 날부터

      괴로운 시련
      그칠줄 몰라

     가슴 깊은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뺨에
      흘러내릴때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랑@

      괴로운 시련
      그칠줄 몰라

     가슴 깊은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뺨에
      흘러내릴때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랑


우리가 그토록 못잊어 하는 가수 裵湖는 누구인가? (www.baeho.com에서 발췌)

世人들은 그를 100년만에 나올 수 있다는 불세출의 가수다,
또는 천재가수다, 매혹의 저음 가수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어려웠고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60년대 후반,
홀연히 우리에게 나타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를 전해주고
29세의 미혼으로 후손도 남기지 못한 채 우리곁을 떠나 버린 歌客  裵湖 ....

우리 민족의 예술 근간인 "한"이 실린 노래,....
클래식을 하는 분들도 약주 한잔하면 그의 노래를 찾는....
그래서 그의 노래는 우리 민족의 모든 마음이 담긴 노래로 평가됩니다.

1971년 11월 7일 지병인 신장염을 이기지 못해 생을 마감한 그는
투병중 가수생활 5년만에 300여곡이라는 경이로운 작품들을 남기고
짧은 삶 동안 그 누구도 만들지 못한 음악 역사들을 만들어놓고 갔습니다.

그가 떠난지 35년(2006년 기준)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를 찾는 많은 팬들의 성원은
그 어느 가수에서도 느낄 수 없는 음악의 혼을 만들고 있습니다.
옛 가수로써는 아직까지 가장 많은 팬들이 찾고 있는 음악역사입니다.

왜, 우리는 그를 못잊어 하고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그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는가? 그는 어떠한 가수였는가?

여기에 그의 못다 이룬 음악세계 모든 것을 실어
많은 분들과 함께 그의 음악 인생을 정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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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24일 중국 산동성 제남시 출생, 본명 : 배만금(개명:배신웅)
평안북도 철산과 신의주가 고향인 부모님으로부터 손아래 남동생을 얻었으나
어려서 사망한 관계로 집안의 4대 독자가 되어 태어났습니다.
일제시절 동경대 수의학과에서 동물학을 공부하시다가  중국 제남에서
운송업을 하시면서 독립군 활동을 한 부친의 영향하에
그는 유년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습니다.

해방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그는 창신 초등학교를 거치고
삶의 어려움으로 인해 부산에서 모자원을 운영하던 이모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부산 삼성중학을 다니다, 음악에 대한 끼를 버리지 못해서
중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갑니다.

당시 서울에는 국내 악단계를 주름잡고 있던 셋째 외삼촌인 김광수 악단이
KBS등 주요 악단을 도맡아 있었으며, 또한 넷째 외삼촌인 김광빈 악단도
가족 악단으로 구성되어 업소와 문화방송 초대악단으로 활동하며
이들 형제 악단이 장안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의 음악적 원조를 찾아보면, 그의 몸에는 일찍부터
외가쪽의 음악에 대한 신동같은 혈통을 이어받은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둘째 외삼촌인 김광옥은 바이올리스트로 북경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였고
셋째 외삼촌 김광수는 일본 명치대를 졸업하고 주로 라틴계 음악을 중시한
50-60년대 국내 악단계를 주름 잡았던 김광수악단 리더였으며
이는 가수 최희준과 국내 락의 대부인 신중현등을 데뷔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이올리스트로서 동요로 유명한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넷째 외삼촌인 김광빈은 중국 제남에서 배호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음대를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온 후 역시 자신의 가족으로 구성된 악단을 운영,
자신과 그의 처(안마미), 조카(배호), 처남(안건마-김정호/어니언스등 음악지도),
처제(안미미,안로미)들로 구성하여 서울 장안의 여러 업소와 문화방송 초대악단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아코디언 주자로 탱고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담고 있으며 유명한 "사랑의 배신자"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직 10대인 배호는 외삼촌 악단에서 심부름으로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외삼촌들의 도움으로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미8군등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김광빈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 자리를 옮겨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지, 문화방송등의 전속 악단으로 활동하였고
당시 김광빈이 만들어준 최초곡인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을(1963년 - 21세)
김광빈 악단의 연주속에 외삼촌이 지어준 배호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애띤 그의 목소리에서 가수로써의 이름을 알리지는 못하였고
그는 김광빈의 도움으로  20대 초반에 자신의 악단인 "배호와 그악단"이라는
악단을 만들어 업소에서 본격적인 자신의 음악을 키워가게 됩니다.

그 때쯤 김광빈은 그 에게 본격 데뷔 음반을 낼 수 있도록
자신이 만들고 연주한 "두메 산골" "굿바이" "차디찬 키쓰" "녹색의 장미"
"사랑의 마술사" "그대만이" 등 6곡을 발표하게 합니다.(1964년-22세)
이 노래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초기 노래들은 트로트와는 거리가 있는
라틴 계열의 수준 높은 노래들로 외삼촌의 차원 높은 어려운 노래들이
아직까지 애띠고 노래의 기회가 적었던 그가 완벽이 소화해내게되고,
깨끗했던 당시의 목소리로 태어나 신인 가수로써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져 가는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직은 어렸던 나이이기에 김광빈은 그 에게 나이 들어 보이기 위해
훗날 그의 마스코트가 되어 버린 검은 테/ 금테 안경과 모자를 씌워줍니다.

그의 이름은 이제 서서히 서울 장안에서 특출한 리듬 감각으로 신명나게
드럼치며 노래하는 가수 배호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음악계에서 활동하는 모든 이들에게 퍼져 나가 관계자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고 관계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국내 최고의 작사가인 전우(비둘기 집 등)와 나규호 콤비를 만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 알려져가는 그에게 무리한 활동이 원인이었을까?
그는 당시 불치의 병인 신장염을 얻게 됩니다.

아직 건강했을 때 방송을 타기 시작한 그의 다음 노래들(황금의 눈,등)은
본격 투병과 함께 묻혀지고, 병상에서 발표한 그외 곡들도
크게 알려지지 못한 채 음반사 창고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러던 그가 1967년 3월, 힘들게 병상에서 녹음한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하였고
거의 같은 시기에  "누가 울어" 안개속에 가 버린 사람"등 13곡을 발표합니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그의 숨에 찬 목소리에 이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방송사의 인기와
팬들의 성원이 이어져 이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25세)


극히 평범하고, 인기 가수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곡이라고 사양했던 이 곡이
배호라는 호소력 깊고 심금을 파고드는 감성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만나면서
가요계는 배호라는 인물로 모든 스토리가 바뀌게 됩니다.

음반사는 발매하는 음반마다 배호의 곡을 몇 곡씩 넣었고
음반을 미처 만들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기를 몰아 역시 병상에서 내놓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은 인기를 연장하여,
히트후 4개월만에 년말 MBC 10대가수에 등극을 시작으로
각종 가수상을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곡들은 가요사상 드물게 20여주 연속 1위를 하는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내놓는 곡마다 히트하면서 평균 일주일에 한 곡씩을 내놓으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활동기간 5년동안 상당기간을 투병 중에서 보냈기에
가끔 있었던 녹음에서는 하루에 몇 곡씩을 녹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를 찾는 팬들은 늘어만 가는데, 배호는 무대에 보이지 않고
어쩌다 나타나면 휠체어에 의지한 채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음악에 대한 프로 정신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상황은 만들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들 게 이어져오던 삶이 운명의 장난인가,
노랫말처럼 "마지막 잎새"를 유작으로 남긴 그는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1971년 11월 7일 "팬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틀린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겨준 수많은 역사를 뒤로 한 채 경기도 양주에 있는 신세계 공원묘지로
그를 실은 영구차는 떠나갔습니다.
그가 떠난 후 여성팬들은 소복을 한 채 며칠이고 집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며 아쉬워했고, 그를 찾아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음악 인생은 헛되지 않고
떠난 후 10년이 지난 81년에도 가장 사랑받는 가수 1위를 유지하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음반사를 몇 개씩 옮겨 다니며 만들어놓은 히트곡들은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혼이 담긴 그러한 노래들이었습니다.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만나볼 수 있듯이 그에 대한 음악평가는
그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음악 역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씨는 한국 가요사에서 가장 완벽한 음을 구사했던
천재 가수라고 평가했고, '누가 배호 앞에서 가창력을 논하랴' 라는 말로
그의 가창력을 평가해 주었습니다.
또한 KBS 악단장을 지내신 김인배씨는 "배호 같은 가수를 찾아봐도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그를 평가한 종합적인 결론인 것 같습니다.

그의 음악성은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팬들의 성원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옛가수로는 가장 많은 팬들과 가장 많은 팬클럽 활동,
또한 가장 많은 시중 유통음반, 가장 많은 노래방 노래곡수, 가장 많은 가짜 음반,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옛가수로는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
활동기간 대비 가장 많은 음반 발매, 가수활동 5년동안 30여개의 각종 가수상 수상,

가장 많은 노래비가 전국에 세워져 있으며, 가수로써는 유일하게 그의 이름을 딴
도로 (배호길)가 삼각지에 지어졌습니다.
그를 뒤따르고 싶었던 70여명의 유명 가수들이 그의 곡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타계당시 그의 묘지에는 국내 최초로 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지난 2003년 10월,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예술인으로 최고의 상인 문화훈장을
그의 음악적 가치를 높이 치하하여 대한민국 이름으로 서훈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가수로써 중요한 부분인 발음이 정확했으며 리듬의 밀고 당김이
그 어떤 가수에서 만날 수 없는 기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옥타브를 넘나드는 음폭과 호소력 깊은 저음의 발성,
모든 부문에서 그의 음악 역사는 대신 세울 사람이 없는 현실입니다.

그의 노래에는 마력이 있다고 할 정도로 듣는 이들에게
전율을 느끼게 하는 감성의 목소리 소유자입니다.


20대부터 80대까지 폭 넓은 연령대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前대통령을 비롯하여 특히 유명 연예인들이 그를 더욱 사랑하는 등
그의 문화적 계층과 폭넓은 사랑은 커다란 문화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의 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도 각종 여론 조사에서 그의 인기는
수위를 차지하는 등 옛가수로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큰 키와 미남형의 얼굴에 속칭 옷걸이가 멋있었으며,
깨끗한 무대매너등이 우리의 인상에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옛가수로는 거의 유일하게 공식 싸이트와 팬클럽 싸이트가 활발히 운영되어
사이버상에서도 그의 인기는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4대 독자로 후세를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그 무었 보다도 안타깝고
유일한 혈육이었던 누이동생 마져도 오빠의 병마와 타계를 지켜본
고통 속에 얻은 병마를 이기지 못해 아직 이른 나이인 지난 2003년 1월
모친과 오빠가 기다리는 하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이제 그를 대신해 그를 가수로 키워주시고 음악을 지도해주신
외삼촌 김광빈님만이 팬들의 성원을 챙겨주시며
우리와 함께 그의 못다 이룬 음악역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그를 못잊어 하고 아끼는 팬들이 영원하는 한
그의 음악은 영원할 것이고 먼 후세에도 이어져갈 것입니다.

여기에 님이 남긴 모든 것을 모아 정리하는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팬들의 많은 성원을 염원드리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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